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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11-18 16:03 조회3,161회 댓글0건본문
헤어웨어의 역사
헤어웨어의 역사는 가체의 역사로부터 시작되었다
<황해도 안악군에 위치한 안악 3호분의 벽화>
4세기 고구려의 벽화로 주인공을 비롯한 주변 인물들이 얹은머리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에도 가체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얹은머리의 경우 서민들은 제 머리만으로 얹은머리를 했지만, 상류층 여성들은 가체를
사용해 얹은머리를 크게 했습니다.
<신윤복 미인도>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보다 머리를 풍성하게 표현해 주는 가체가 부녀자들의 머리장
식에 필수이자 유행이 되었습니다.
18세기 신윤복의 대표작인 미인도에서의 여인들이 전부 가체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볼때,
이 시기 가체는 단순한 머리 장식이 아닌 미의 조건을 갖추기 위한 필수 조건 이었음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정조 12년, 백성들은 값 비싼 가체를 사기위해서는 논밭과 집을 팔아야 할 형편이고, 가
난한 사람들은 가체를 마련하지 못해 혼인을 한 후에도 폐백을 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가체의 폐단은 돈 문제로 그치지 않고, 그 외에도 당시 어린신부들은 가체의 무게를 눌려
목이 부러진 사례도 있다고 합니다.
가체가 성행하자, 유학자들은 가체를 사치의 대명사로 지적하고 백성들이 검소하게 지내
야 한다며 금지할 것을 촉구하기까지 했습니다.
조선은 사치를 금지하는 나라였지만, 과시하고 싶은 사람의 욕구 때문에 사치는 쉽게 사
라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영조32년, ‘가체의 사치’ 때문에 가체 금지령를 내렸는데 7년뒤 금지령을 거둬내었
다가 정조 때 다시 가체신금사목이라해서 따로 법령화하기에 이릅니다. 그 때는 아예 얹
은머리 자체를 금지하고 머리 모양이나 장식까지도 조목조목 까다롭게 규제를 했습니다.
이렇듯 가체의 유행은 당시 여인들의 미의 의식 그리고 시대상의 변화와 맞물려 조선시대
의 기본적인 머리 형태인 얹은머리에 가체를 올려 자신의 아름다움과 부를 과시한 표현으
로 보여집니다.
자신의 머리위에 실제보다 높게 가체를 올렸듯이 가체의 복층 구조를 현대적으로 재해석
하여 볼륨스타일, 볼륨 컨셉을 지향하는 헤어웨어 패션이 탄생되었습니다.
가체가 현대에는 헤어웨어라는 패션의 새로운 장르이며, 인간의 새로운 의생활로 창조된
것입니다. 조선시대 가체가 권위와 부의 상징이었듯 현대에도 머리의 볼륨은 권위와 부의
상징이며 남편의 지체를 의미 합니다.(대통령 영부인)
입고 벗기에 편리한 헤어웨어는 이제 미래 스마트 헤어웨어 시대를 예고하며 삶의 질을
높여주는 가장 획기적인 패션으로 패션의 미래 시장을 개척해 나갈것입니다.
가체>헤어웨어>스마트 헤어웨어로 진화하는 과정에는 “두상성형은 불가하다” 라는 금기
를 작은 아이디어와 역발상 미션으로 황금비율 라인을 적용, 황금비 패턴으로 1차 성형
복층패턴을 통해 2차 및 3차 성형으로 완벽한 볼륨 스타일을 완성하였습니다.
볼륨컨셉의 절대기준을 제시하는 헤어웨어는 자신감과 지체를 높여 극상미를 연출해 주는
행운 패션입니다.
행운 스타일이라는 닉네임을 가진 헤어웨어는 아름다움의 한계를 넘어 새로운 삶에 변화를
주고 내안의 진정한 나를 찾게 하는 행운의 전설이 되어 헤어웨어를 입은 사람들의 행운 스
토리가 세상에 새로운 행운의 감동을 안겨다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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